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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너머로: 이승우의 "생의 이면"

활자들 2014.03.01 18:54

...그저께 쓰다 잠든 데서(2014/02/27 - [활자들] - 그 책들 그리고 이승우) 이어 적으면,


5.
작가 평전의 형식을 빌린 
이 메타픽션적인 자전소설 "생의 이면"도 사실 그랬다.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던 박부길은
몸과 마음이 세상에 할퀴어진 어느 날, 늦은 밤에 
우연히 피아노소리가 들리는 어떤 교회당 안으로 숨어든다. 
거기에서 만난 연상의 주일학교 여선생님으로 인해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상대방을 지치게 하고 스스로도 괴롭히던 그의 사랑은
이내 파국적인 끝에 닿는다. 그녀는 떠나고,
신학교를 자퇴한 그는 어두운 자취방으로 돌아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처녀작이 바로 '지상의 양식'이다."

요약하라면 이런 식으로 쓰여지게 될 
소설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어디선가 읽어본 듯 조금 진부했고, 통속적이기도 했다


6.
뚜렷하게 드러나는 오이디푸스적 살부 모티프는 
솔직히 말해서 강렬하다기보다는 도식적으로 느껴졌고
"그녀가 정말로 애인의 학습욕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입술을 경품으로 걸었느냐"(239쪽) 식의
'이전세대 남성작가'스러운 표현들도 불편했다.

또 "강대상에 서서 심령에 비수를 던지는 것처럼 감동적인 설교"(200쪽)와 같은
개신교적인 특정 어휘나 분위기에 나도 모를 이물감이 일곤 했다.
근거 없는, 정서적인 거부반응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이 어떻게 안 되었다. 그런데도


7.
읽는 내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내밀한 곳의 가장 연약한 데 닿아
훅 낚아꿰어 끌고 가는 것 같았는데
그 느낌이 뜨겁고 고통스럽고 아늑했다.
고열에 시달려 누워 있을 때의 묘한 평온함 같은, 혹은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쏟아내면서 불처럼 다툰 직후 찾아드는 
참담한 평화와 같은, 그런.

이 소설의 특정한 부분은 마음을 건드렸고
끝까지, 정말 끝까지 파고들었다. 
힘겨워서 고개를 돌리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힘이
그의 소설 안에는 있었는데, 아마도 그건 고통에서 배여져나오는 
관념을 넘어선 어떤 물리적인 진정성인 듯했다.
어디까지 얼마나 소설적인 허구를 덧입혔는지와 상관 없이 
작품이 자전적으로 읽혔던 것도 그래서였다.


8.
"...그는 신에게 투항하기로 오래전에 작정한 터였다. 그 길만이 그녀에게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서만 신을 이해했고, 그녀를 통해서만 신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신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었고,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었다...그는 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 신을 잃어버리면 그녀에게 갈 수조차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196쪽)


"....이러한 사유 안에서 그의 지반은 자신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도 아니다. 그녀이다...그가 보고 바라고 의지하고 꿈꾸는 그녀는 실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머리 속에서 창조해낸 완벽한 여자를 그녀에게 투사했을 뿐이었다.

이 명제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경고한다. 그를 받치고 있는 이 인공의 지반이 허물어져 버리면 그의 존재 자체가 일시에 위협받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그녀는 절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럴 수 없으므로, 완벽함은 그의 꿈이므로, 이 지반은 언제든 허물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240쪽)


여기서 박부길의 '그녀'는 단순히
긴 생머리 교회누나 로망의 원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교회의 한 은유였던 것 같다.
(물론 교회건물 말고 '성 교회'라고 말할 때의 그 교회^^;)
한 사람이 그것의 일면과 조우하는 순간들 말이다.

사람에 따라 이는 합창소리나 오르간 연주, 성화나 성상일 수도 있고,
전례예식이나 성사, 교회공동체, 기억에 각인된 어떤 장면 혹은
그 안의 누군가로 표상되기도 할 것이다. 
박부길은 이 중에 맨 마지막 경우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후반부는, 표면적인 줄거리처럼
교회누나를 숭배하던 젊은 목사지망생의 사랑실패담이 아니라

상처 가진 한 인간이 한 종교의 귀퉁이에 닿아 
위로를 경험하고, 안식을 찾고, 선망을 키우고, 
자기 방식대로 신을 이해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좌절하고, 시기하고, 상처 입고 상처 입히고, 배워가는 영혼의 성장기였다.
그렇게 나는 읽었다. 영화 "밀양"의 신애 이야기처럼 말이다.


9.
"그녀는 나에게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녀라는 창을 통해 나는 세상을 보았다. 나는 또 그녀를 통해 신에게 이르고자 했다. 그리고 나의 이 절대적인 사랑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도 나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장담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숭배했으니까. 숭배야말로 사랑의 최고의 형식이라고 믿었고, 나는 그 최고의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에 붙는 이름이 아가페라면 나의 사랑이야말로 아가페여야 했다.

아가페라니? 사람이 사람을, 더구나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아가페할 수 있단 말인가. 니그렌은 아가페를 신의 사랑이라고 했다. 조건이 없으며 자발적인, 아래로 내려오는,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주는, 비동기적이며 넘쳐 흐르는...그리하여 마침내 아가페는 '인간에게 이르는 신의 길이다.' 그런데 아가페라니.

...나는 나의 사랑이 나의 '결핍과 필요에 의존해 있는,' '소유하고 얻으려는 욕망'의 위장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사랑이 '고상하게 승화시킨 일종의 자기 주장'이라는 걸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 안에 투영된 나, 그녀를 통해 메우고 채워질 나라는 걸 나는 몰랐다.

...나에게는 세상의 어떤 연인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는 내가 필요했다. 그녀는 완전해야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했다. 그런 관념을 통해 나는 만족을 얻었다.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한, 그것은 나의 불행이었고, 나의 사랑의 예정된 비극이었다." (259-261쪽)


소설 말미에 후일담처럼 남겨진 이 문장들을 읽으며
울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10.
여러해 전, 원총 술자리에서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 한 선배님이 
"요즘 소영이 홈피 가보면 온통 성당 이야기밖에 없던데?"하며
말문을 여셨었다. 첫 성주간, 첫 성삼일, 첫 성시간의,
내겐 첫사랑 같았던 그해 늦봄의 일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사회과학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허구한날 적어대는 건 한심하다고 하셨다.
"신앙이 소영이를 그렇게 만든 거 같다" 고.

다른 선배들이 "형 또 왜 그래요-" 말리며 화제를 돌렸지만
난 솔직히 마음이 별로 상하진 않았다. 한 귀로 들은 게 다른 귀로 흘러나갔다.
맑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그 선배께 예수님은
'역사적 예수'나 '혁명가'의 모습으로 오실 수 있겠지만
내게 오실 때는 아름다운 음악이고 따뜻한 볕이셨으니까. 
그렇지만 이어서 하신 한 마디는 전혀 뜻밖이었고
나에게 충격이었다.

신앙이 너를 도리어 더 어둡게 만드는 것 같다고, "선배는 니가 걱정된다"고.


11.
내가 아는 건강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서는
밝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명랑한 기운이 자연스레 감돌았다.
만일 내게서 어두움과 부자연스러움이 감지되었다면 
그렇지 않다고 '내 쪽에서' 항변할 순 없는 것이다. 나는 

밝고 따뜻해지고 싶었다. 그럴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지. 넘어질 때도 놓진 않았었다. 
그렇게 내내 놓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준 무언가가 
내 안에서 깨어지고 무너져내릴 것 같았던 그때,

문득 알았다. 왜 소설 속 저 구절에서
마음이 그렇게 아팠었던지를.
나의 신앙은 박부길의 사랑처럼 '예정된 비극'일까. 여기서 끝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어떤 기억이 빛처럼 스쳤다.


12.
"미사에서 어떤 게 그렇게도 좋아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커피 머그잔을 손에 쥐고 머뭇하다가
그냥 미사 예식이, 전례가 저는 너무나 좋다고, 
'그 시간이 주는 기쁨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안 될 거 같아요'라
답을 드렸었다. 들으시더니 잠시 후  
"감상적이네요"라 하셔서

나는 시무룩 풀이 죽었다. 이어서, 말씀해 주셨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라고, 원래 
거기서부터 영성이 차츰 성장해가는 거라고, 
'시작은 그런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서 이듬해에도 "미사가 기쁜 것 같아요"를 연발하는, 
감상적인데서 별로 더 '성장'하지 못한 영성이기는 했지만  
(2013/06/15 - [그 사랑] - 세례성사 전까지)
정말로 그랬다. 난, 기뻤다.


13.
내가 소설 속 박부길처럼
위로를 경험하고, 안식을 찾고, 선망을 키우고, 
자기 방식대로 신을 이해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좌절하고, 시기하고, 상처 입고 상처 입혔던,
나의 '결핍과 필요에 의존해 있는,' '소유하고 얻으려는 욕망'의 위장에 불과한,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했던' 
그 짧지는 않았던 날들동안, 

그럼에도 나는 소설 속 박부길과는 달리
감상적으로라도 미사는 언제나 기뻤고, 몸으로라도 이 안에 항상 머물렀다.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남겼을 그분의 흔적에 
나는 희망을 갖는다.


14.
저자는 그렇게 어둔 방으로 돌아가 첫 작품을 썼다.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어둠 너머로 나아갔다. 
그의 시작은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시작은 이렇다.




"...Vergine Purissima, Regina della pace,

sciogli i molti, intricati nodi

che rendono triste e complicata la nostra v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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